옥스퍼드 여행을 하면서 C.S. 루이스라는 인물에게 부쩍 관심이 생겼다. 옥스퍼드 거리를 걷다 보니 그가 공부하고 가르쳤던 공간, 동료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펍, 그리고 그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진 장소들이 전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아이가 《나니아 연대기》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쓴 작가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져 나도 루이스의 책과 관련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판타지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그는 사실 기독교 신앙을 지성적으로 변증한 대표적인 작가이자 사상가였다. 무신론자였던 그가 회심한 뒤 남긴 글들은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을 알아보다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발견했다. 루이스가 인간의 몸이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동안 진화론과 창조론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입장으로 생각했고,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창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기독교 변증가인 루이스가 유신진화론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니, 그렇다면 그는 성경의 창조를 부정한 것일까? 무신론적 진화론과 타협한 것은 아닐까?
그 의문에서 나의 작은 탐구가 시작됐다.
루이스가 받아들인 것은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었다
먼저 정확히 말하면 루이스가 오늘날의 ‘유신진화론’ 또는 ‘진화적 창조론’이라는 체계를 완성해 주장한 신학자는 아니다. 그가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유신진화론자라고 규정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저술에는 하나님이 생물학적 과정을 사용해 인간의 육체를 준비하셨을 가능성을 열어둔 대목이 분명히 나타난다.
<고통의 문제>에서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이 될 생물학적 형태를 준비하시고, 어느 순간 그 존재에게 새로운 의식과 자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셨다는 방식으로 인간의 출현을 설명한다. 인간의 육체는 이전 생명체와 생물학적인 연속성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든 이성과 도덕성, 자유의지와 하나님을 향한 인식은 물질의 작용만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루이스가 받아들인 진화는 “아무 목적도 없이 우연히 인간이 생겨났다”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와는 다르다. 그는 하나님을 제외한 물질과 우연만으로 우주와 생명, 이성과 도덕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사상을 경계했다. 생명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세계에는 창조자도 목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같은 말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유신진화론 역시 진화가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진화라는 과정도 하나님의 주권과 질서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한다. 창세기의 ‘흙’을 반드시 현대 과학 교과서와 같은 물질적 제작 과정의 설명으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본질을 드러내는 신학적 언어로 읽을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 입장이다.
이 지점에서 내 오해 하나가 풀렸다. 루이스는 창조를 버리고 진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얼마나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드셨는가가 아니라, 인간을 존재하게 하신 분이 누구이며 인간이 누구를 위해 창조되었는가에 있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과학은 창조 세계의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은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성경에 직접 나오지 않는 ‘인간 이전의 생물학적 단계’를 상정하는 것은 성경에 과학 이론을 끼워 맞추는 해석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특정한 순간 인간에게 영혼이나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다는 설명 역시 루이스가 제안한 하나의 신학적 추론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화석 몇 점을 가지고 인류의 기원을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이런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성경과 과학이 애초에 같은 목적을 가진 책과 학문인지부터 생각하게 됐다.
성경은 과학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왜 하나님과 멀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의 기록이다. 물론 성경에는 실제 인물과 사건, 민족과 나라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역사를 기록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구의 물리적 연대나 생명체의 형성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드러내는 데 있다.
창세기 역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주와 생명이 우연이나 다른 신들의 다툼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것이 창세기 창조 기사가 전하려는 핵심이라면, 그 기록에 현대 생물학이나 지질학 교과서와 같은 설명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의 목적을 좁히는 일일 수도 있다.
과학도 하나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창조자가 아니다. 과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안에 존재하는 질서와 작동 원리의 일부를 인간이 관찰하고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력과 유전, 세포와 별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발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발견한 과학적 원리는 광대한 창조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던 질서의 극히 일부일 수 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관찰하고 설명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그러나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왜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는지, 인간의 생명이 왜 존엄한지, 죽음 이후의 소망은 어디에서 오는지와 같은 질문에는 과학만으로 충분히 답하기 어렵다. 반대로 성경은 세포의 분열 과정이나 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을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다.
성경과 과학을 반드시 어느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져야 하는 경쟁 관계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은 창조의 주체와 목적을 말하고, 과학은 창조된 세계 안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과 원리를 탐구한다. 두 영역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다루는 질문과 목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창조의 ‘방법’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
물론 과학의 역사에 오류와 조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12년 발표된 ‘필트다운인’이다. 인간의 두개골과 오랑우탄의 턱뼈 등을 조합해 만든 가짜 화석이 오랫동안 고대 인류의 흔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과학자도 시대적 편견과 개인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과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모든 주장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필트다운인이 조작임을 밝혀낸 것 역시 새로운 연대 측정과 해부학적 비교, 화학 분석을 수행한 과학자들이었다. 과학의 오류는 과학 전체가 거짓이라는 증거라기보다, 과학적 결론이 새로운 증거에 따라 끊임없이 검증되고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현재의 과학 이론이 앞으로도 절대 바뀌지 않을 최종 진리라는 뜻은 아니다.
현대 고인류학도 인간의 진화를 화석 한두 점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화석의 해부학적 특징, 다양한 연대 측정 결과, 고고학적 도구와 생활 흔적, 현대인과 고대 인류의 유전체 자료 등을 함께 비교한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얻은 결과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맞지 않는 증거가 발견되면 기존 설명을 수정한다.
동시에 창조론 안에도 생각보다 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6일 창조를 문자적인 24시간으로 이해하는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래된 지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생명의 주요 단계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보는 입장, 진화의 과정 전체를 하나님의 창조 방법으로 이해하는 진화적 창조론 등이 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기록으로 읽으며 성경의 권위와 아담의 역사성을 지키고자 한다. 반면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이 자연법칙과 긴 생물학적 과정을 사용해 생명을 창조하셨을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어느 입장이든 답해야 할 어려운 질문은 존재한다. 진화적 창조론은 인간 이전부터 존재한 죽음과 고통을 타락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설명해야 하고, 젊은 지구 창조론은 천문학과 지질학, 유전학에서 축적된 자료를 어떻게 일관되게 해석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
나는 아직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완벽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여전히 성경의 창조 기사를 가능한 한 성경 자체의 의미 안에서 이해하고 싶고, 과학적 가설을 성경 위에 두는 것도 경계하고 싶다. 동시에 내가 익숙하게 믿어온 해석 하나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를 통해 내가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창조의 방법보다 창조의 주체였다.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이든 수십억 년이든, 인간의 육체가 한순간에 완성되었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긴 생물학적 과정을 거쳤든, 우주와 생명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우연히 발생한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이며, 성경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
과학이 밝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광대한 세계의 원리 중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일부분일 것이다. 과학적 설명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창조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논쟁에서 상대를 이기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신앙의 본질이고 무엇이 서로 다른 해석을 허용할 수 있는 영역인지 분별하는 지혜일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옥스퍼드 여행과 아이가 사랑한 <나니아 연대기>에서 시작된 궁금증은 결국 나에게 창조를 다시 묻게 했다. 아직 모든 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이전보다 분명해졌다. 창조의 방법에 대한 인간의 설명은 달라질 수 있어도, 만물을 지으시고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참고 자료